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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있는 지식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성 대첩

by 사락사락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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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성 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이것은 앞에서 쓴 글 이순신 3대 대첩과는 다른 맥락으로 임진왜란 기간에 있었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던 대첩들 중 가장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알아 보는 것이다. 그중에서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성 대첩이 있다.  

 임진왜란 부터 알아봐야겠다.

 

 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으로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나서 임진왜란 .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어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1. 한산도 대첩 

1592년 (선조25)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기 및 경상 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근이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1)내용

일본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라 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이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젹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일본 전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때 일본 수군의 세력은 모두 73척으로 지휘관은 와키자카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르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 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 적들을 유인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군 함대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매복을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 와키자카가 이미 휘하의 천오백 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 전투를 경험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으므로 조선 수군을 추격해 넓은 바다로 진입했다. 와키자카의 함대가 들어서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기다리기전 전선들은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하지 못하고 40척이 넘는 군함을 읽었다. 지휘관인 와키자카 본인도 지휘선을 관총한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후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이백 내지 사백 여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내버려 둔 채 인근의 무인도로 도망쳤으며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은 멀리서 관망하다가 모두 격침당하자 김해로 후퇴했다. 그런데 와키자카를  선 수군이 계속 집요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와키자카는 간신히 도주에 성공한다. 13일이나 미역과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2) 결과 

일본군은 이틀 뒤인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함 구키 요시타가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100척 이상에 달하는 대함대가 고작 사흘 만에 수장당하였다. 

 

이에 더이상 해상 전투에는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근이 완전히 되찾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남해의 제해권을 일본이 장악한다면 한반도에 있는 일본 육군의 보급이 매우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일본은 서해를 장악한 이후의 육군 보급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수군 주력의 대부분을 투입하면서 남해의 제해권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지켜낸 남해의 제해권은 한반도의 일본 육군에게도 큰 타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2.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1593년 음력 2월에 행주산성에서 일어난 일본과의 하루동안의 싸움이다. 권율 장군이 총지휘했다. 

 

(1) 내용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한양의 서북방 전방인 행주성에 소수의 조선군이 집결해 입음을 알게 되었는데 , 그 조선군은 명나라군의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성에 주둔 중인 전라도 순찰사 권율 휘하의 조선군 3천이었다.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 이어 보름 만에 이 권율부대에게 재차 호전적 반을 보이며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모아 공격에 나선다.  (음력 2월 12일)

 행주산성은 백제 시대 축성된 곳으로 내성인 석성과 외성인 토성이 있으며 밖으로 몸ㄱ책을 2중으로 두르고 화차 등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고 있었다. 여기 있던 조선군은 고작 약 3천여 명이었는데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의병을 포함한 것이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군은 변변한 공성 장비도 없이 무조건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일본 1군은 궤멸,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3군은  누각을 짓고 총병과 궁병을 올려 총포와 활을 쏘아가며 공격하는 전통적인 공성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조선 육군은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천자총통을 보유하고 있었고 포 사격으로 누각을 보병째로 손쉽게 파괴했다. 

 4군은 총대장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가 직접 진격하였다. 이 공세에 바깥쪽 목책이 뚫리면서 조선군은 후퇴했고 자칫 방어선이 붕괴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오고 만다. 그래서 조선군은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가 있는 중군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시켰다. 당시 행주성 주둔 조선군은 총통. 그리고 승자총통 다수를 신기전 틀에 고정시킨 변이중화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화포 공격으로 총사령관 우키타와 미츠나리가 부상을 입으면서 일본군 4진도 물러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내책에 불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화공을 예상하고는 미리 물을 준비해 두었고 5군의 화공은 간단히 파해 되었다. 

 일본군 6군은 서쪽의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올라와 공격하였다. 하지만 성벽을 지키고 있던 승병들이 느닷없이 석회 주머니를 터뜨려 뿌려대는 바람에 일시적 실명과 호흡곤란을 겪으며 무력화된 후 격퇴퇴었다. 

 7군은 승병들이 지키던 서북쪽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모면서 승장 처영과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일본군은 가히 인해전술이라 할만한 물량으로 조선군을 몰아붙였고 일분군이 장기 삼는 백병전이었지만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운 터라 쉽게 밀리지 않았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충청 수사 정걸이 배 2척에 수만 말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 왔던 것, 게다가 양천으로 가는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지나갔는데 이것이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이들이 적의 후방쯤에 내릴 기색을 보이자 일본군도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겼다. 

 

(2) 결과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유시( 저녁 5-7시) 가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미츠나리는 참수당한다. 반면 권율은 이몽학의 난을 제압하고  전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 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벼슬은 한성부 판윤까지 이르었고 사후 충장이라는 시호까지 받아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일본군은 파주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 이후 약 2달간의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소강 기단이 있었다. 일본군 전군이 한성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산 등지로 철수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 년 만에 조선군이 수도를 수복했다. 

 

3. 진주성대첩 

1592년 11월 9일 (음력 10월 6일)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에서 일어난 일본과의 싸움이다. 

 

 

(1) 내용 

진주성 공략이 시작되자 김시민은 의병장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자나깨나 달아날 궁리만 하는 부항 장수들과 군민을 너른 터에 모아놓고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왜군 선발대 일만여 명이 본격적인 진주성 공격 이전에 주위의 지원부대를 제압 할 목적으로 먼전 유숭인의 부대를 공격 전멸시켰다. 김시민은 이를 보고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곽재우가 임기응변으로 대처해 다시 시기를 회복한다. 
10월 6일 왜군이 성 공격을 시작했다. 성안에서 대포를 발사하며 방어했다. 왜군은 근처 민가를 헐러 방패만과 공성 무기를 준비했다 한다. 곽재우가 지휘하는 군사 이백 여명이  뒷간에 올라가 호각을 불고 횃불을 흔들어 성안을 응원하자 성안 사람들도 호각을 불어 응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군사들이 우왕좌왕 소란을 벌였다. 
10월 7일  왜군이 하루종일 공격했으나 수비군이 잘 막아냈다. 밤이 되자 김시민은 심리전을 구사했다. 악공을 물러 거문고를 타고 퉁소도 불게 했다. " 한양이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붕괴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떻게 지키겠어요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세요라고 외치게 시켰다. 전쟁에 어린이를 이용하는 모습에 분노한 조선군 군사들이 대응하려 하자 김시민은 이에 대한 대응을 일절 금지하였다. 
10월 8일 아침 왜군은 대대적인 진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진주성은 함락 직전가지 갔고 간신히 막아내는 것은 성공했으나 보급품이 떨어지는 등 상황은 어려워져만 갔다. 김시민은 왜병들이 접근하면 화살을 아껴 돌을 던지게 했다. 

10월 9일 공성에 계속 실패하자 계략을 써서 성안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내기로 하는데 밤에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어 어둠을 환하게 밝혀놓고는 거짓 퇴각을 하는 척했다. 아이가 내일 새벽에 총공격을 한답니다. 하고 알려주었다. 
왜군이 총공세에 들어갔고 외벽이 일시 점령되어 수비진이 뚫렷다. 내벽은 아직 온전했고 양측을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마침 악천후에 밤이 되어 난전이 벌어졌다. 김시민은 시체 속에서 숨어있던 왜군이 쏜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 곤양 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일 일본군은 결국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2) 역사적 영향 

 

진주 대첩은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전쟁의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진주전 당시 왜군 사망자는 지휘관 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여 명이 넘었고 왜군은 후퇴할 당시 사망자가 많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모든 시신을 불태워 화장하고 후퇴했다. 이때 만약 패배해 전라도 방어선이 뚫렸다면 해상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던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마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인 것이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온전히 보호하여 의병활동과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켜준 대단히 중요한 전투이다. 일본은 진주성 참패에 분노하였다. 도요토미는 2차전을 지시하면서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고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다. 2차 전투에서 진주성은 함락되긴 했지만 조선군이 일본군 10만을 상대로 열흘을 버텼기 때문에 일본이 이기기는 했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피해가 났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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