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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불안과 혼란, 방황의 나를 찾아가는 길 데미안

by 사락사락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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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혼란, 방황의 나를 찾아가는 길 데미안  


책 제목: 데미안 (1919)
지은이 : 헤르만 헤세
출판 : 믿음사

헤르만 헤세가 지은 데미안은 어렸을 때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읽을 수록 지금 어른이 되어 읽었더니 조금은 이해하겠다.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었던 우리 모습 같다. 지금도 사는 것에 정답을 모른 체 살아가지만 그래도 방황은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느낀다.

이 작품은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이 따스한 가정 다정한 부모님 아래서 자라면 선의 세계만을 알았던 싱클레어는 동네 소년 프란츠 크로머에게 도둑질을 했다는 허풍을 떨면서 악의 세계 또한 깨우치게 된다. 어느 날 그런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신비한 소면 데미안응 그에게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진실에 대해 하나씩 가르티기 시작한다. 내면의 선악 사이에서 고뇌하던 싱클레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가 금지된 쾌락을 추구하면 타락하기도 하나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어두운 내면을 이겨낸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의 촛ㅇ을 그리지만 그 초상화는 어느새 데미안과 닮아 있었다. 데미안에 대한 동경과 강렬한 그리움이 베아트리체에서 데미안을 보게 한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실에서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부인을 만나고 그 재회 이후 에바 부인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던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뒤 전쟁이 발발하고 그 전쟁에 참전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야전 병원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자신이 필요할 때면 자기 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은 남기 데미안은 다음 날 아침 사라져 버리고 싱클레어는 어느새 데미안과 똑같아진 자신의 모습을 마음 속에서 찾아낸다.

작가소개

헤르만 헤세
1877년 독일 남부 칼부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인이 되고자 수도원 학교에서 도망친 뒤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수숩사원으로 일했으면 열 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질퐁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십대 초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스위스 몬타뇰라 로 이사한 1919년을 전후로 헤세는 개인적인 삶에서 커다란 위기를 겪고 이론 인해 그의 작품 세계도 전환점을 맞이한다. 술과 여인 그림을 사랑한 어는 열정적인 화가의 마지막 여름을 그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과 데미안이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헤세는 이 작품들과 더불어 소위 내면으로 가는 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헤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며 이후 그림은 음악과 더불어 헤세의 평생지기가 되었다 . 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생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인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영면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을 속박하지 않고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 적절한 선은 지키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하지만 어려워한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마음대로 살다가는 내가 걸리는게 많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살기에는 이 나를 둘러싼 세상안이 더 안정적으로 느껴져서 그렇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새로운 세계에 나아가려면 지금 있는 세계를 벗어 나야 한다.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신에게 날아간다. 여기서 신은 무엇일까? 나 자신이 아닐까? 나를 찾아서 날아가는 것 말이다.

금지되었다 라는 것은 그러니까 영원하지 않아 바뀔 수 있는 거야. 우리 누구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 되어 있는지,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무엇이든 정해진 것은 없다. 언제든지 변화하고 바뀔 수 있다. 고정 된 틀에 나를 붙잡아 두지 말고 벗어나 새롭게 시작해도 된다는 말이다 . 내 생각을 그렇다. 정해진 것은 없다. 사람도 전공한 학과에 따른 일만 고집해서 안해도 된다. 나를 변화시키고 싶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누가 머라해도 내가 정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가야 겠다. 옆에서는 넌 안되. 네가 잘 할거 같아? 이런 소리만 해도 나 자신을 믿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겠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단 한가지 뿐이다.

나는 이 때까지 나를 알아가지 않았다. 주위 사람이 하라는 대로 살아 온거 같다. 하지만 이 구절은 나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기 자신게 도달한다. 이 말이 너무 와닿는다. 지금 나 자신과 친해지고 알아가는 것 같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탄생이니까 두려운 새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니까

죽으면 다 없어진다. 걱정도 불안도 그럼 나는 홀가분해지겠지. 다시 새롭게 시작할수 있겠지
그래 나는 죽은 거 처럼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그런 모습이 가만히 바라보는 것, 비이성적이고 얽히고 설킨, 기이한 자연의 형태들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내면에서 이 영상을 이루어지게 한 내면의 의지와일 일치감을 낳는다. 우리는 곧 그 일치감을 우리 자신으리 기분으로 우리 자신의 창조로 여기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사물들, 사건들 내가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모든 창조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어려운 책이지만 나름 내 맘대로 해석하며 읽었다. 책은 받아 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감동이 다른 것 같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느낀대로 느끼면 그만이다. 그게 독서의 매력인거 같다.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해석하는 것은 내 마음인것이다.

나는 알에서 나오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도 찾아가고 싶다. 지금 이게 사는게 내고 하고 싶은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고 화단 가꾸고 자수하면서 띵가띵가 하면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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